목양실에서

지헌이가 있던 자리

작성자
담임목사
작성일
2019-11-22 16:47
조회
198
지헌이가 놀다 갔습니다.
엄마 따라 왔다가
한참을 놀다가 점심을 먹고 갔습니다.
지헌이가 떠난 자리에는
지헌이의 흔적으로 가득합니다.

"지헌아, 걸을까, 안을까?"
"안아!"
지헌이를 안고 교회 밖을 걸었습니다.
가을은 깊어 단풍은 끝자락을 보이고 있고
낙엽 되어 하나씩 떨어지고 있습니다.
바람에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낙엽이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할레디, 떨어져요."
부쩍 존댓말이 늘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데려오니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큰소리입니다.
"@#$%^&*"
정확한 소리는 아니지만 기도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멘!"
역시 큰소리로 끝을 냅니다.

며느리가 지헌이 나이일 때
무릎을 꿇고 뭐라고 종알종알 하면서 기도하더랍니다.
엄마를 닮았습니다.

애찬실에 와서 마이크를 켰습니다.
"할레디, 내 것-, 내 거엇-!"
마이크를 주었습니다.
옆에 있는 성경책을 가르치면서
"할레디, 말씀 읽어요!"
못 알아들었습니다.
"응?"
"할레디, 말씀 읽어요!"
성경을 읽으라는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지헌이는 마이크에 대고 찬양을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지나가는 교인들이 한 마디씩 합니다.
"누가 목사 손자 아니랄까봐!"

지헌이를 볼 때마다 많이 놀라는데
오늘도 변함없이 놀랐습니다.

몇 주 전에 사준 꼬마용 자전거에 올라탑니다.
"할레디, 밀어주세요!"
손자는 열심이 페달을 돌리고
할아버지는 뒤에서 밀어줍니다.
애찬실이 좁아
밖으로 나갔습니다.
주차장이 좁다고 싱싱 달립니다.

30년도 더 된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한국 장위동이었습니다.
장위동에는 비탈길이 있었습니다.
아들 캐빈이 (그때는 효진) 자전거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비탈길이 되서 아차! 하는 순간 탄력이 붙었습니다.
자전거는 어린애가 감당할 수 없는 빠른 속도가 되어 비탈길을 내리달렸습니다.
아들은 나를 바라봅니다, 잡아달라고.
빠른 속도 때문에 한쪽 밖에 잡을 수 없었고
균형을 잃은 자전거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전거에 깔린 아들은 엉엉 울었습니다.
그 아들을 껴안고 달래주던
빛바랜 옛날이 생각났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이제는 손자의 뒤를 밀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가을은 낙엽을 떨어뜨리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고
지헌이가 떠나간 자리, 그 흔적을 보며
지나간 세월을 줍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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